하야시 쥿사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야시 쥿사이는 에도 막부 시대의 유학자로, 하야시 가문의 8대 학장이자 쇼군의 개인 고문 역할을 했다. 그는 주자학을 기반으로 청나라 고증학을 수용했으며, 간세이 개혁 시기에 쇼헤이자카 학문소 개편을 주도했다. 쥿사이는 막부의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조선 통신사 접대 예법 개혁에도 관여했으며, 저서로 『가원만금』, 『일존총서』 등이 있다. 1915년 종4위가 추증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사토 잇사이, 마쓰자키 고도 등 저명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와무라번 사람 - 마쓰다이라 노리마사
마쓰다이라 노리마사는 에도 시대 초기에 고바리 번주와 고모로 번주를 지낸 미노 이와무라 번 마쓰다이라가 출신의 다이묘로,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쓰나요시를 섬기며 막부의 요직을 맡았고, 시나노 고모로 번 통치에 기여했다. - 하야시가 (유학자) - 하야시 가호
하야시 가호는 에도 시대 초기의 유학자이자 관료로서, 아버지 하야시 라잔의 뒤를 이어 도쿠가와 막부를 섬기며 막부의 학문 정책을 주도했고, 일본 역사와 유학에 정통하여 역사 편찬 사업을 주도하여 근세 일본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하야시가 (유학자) - 하야시 호코
하야시 호코는 에도 시대의 유학자로,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부터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까지 5대에 걸쳐 막부를 섬기며 유시마 성당을 설립하고 유학을 장려했으며, 《호코 학사집》 등의 저서를 남겼다. - 1841년 사망 - 윌리엄 헨리 해리슨
미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미영 전쟁 영웅으로, 하원의원, 상원의원, 인디애나 준주 지사를 역임한 후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한 달 만에 폐렴으로 사망하여 최단 기간 재임 대통령으로 기록되었고, 그의 죽음은 미국 대통령직 승계에 대한 헌법적 논쟁을 야기했다. - 1841년 사망 - 민망 황제
민망 황제는 응우옌 왕조의 제2대 황제로 즉위 후 국호를 변경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으나, 기독교 탄압과 반란 야기로 국제적 고립과 프랑스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다는 비판도 받는 인물이다.
하야시 쥿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하야시 쥿사이 |
원어 이름 | 林 述斎 |
출생 | 1768년 8월 10일 |
사망 | 1841년 8월 30일 |
사망 장소 | 에도 |
직업 | 신유학자 학자 행정가 작가 외교관 |
학문 | |
분야 | 일본 역사, 문학 |
가족 | |
친척 | 하야시 |
경력 | |
대학두 | 대학두(大学頭) |
2. 인물・약력
하야시 쥿사이는 시부이 다이시쓰(渋井太室) 등에게서 배웠다.[9] 간세이(寛政)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가 사망하여 하야시 가문이 대가 끊기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주선으로 쥿사이가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고 대학두(大学頭)가 되었다.[9] 이로써 쥿사이는 막부의 문서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쥿사이는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와 함께 간세이 삼학사(寛政の三博士)로 불리며, 유학 교육 쇄신에 힘썼다. 이들은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를 막부 직할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간세이 이학 금령(寛政異学の禁)).[9]
쥿사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의 서적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을 제자 오고 요시노리(大鄕良則)에게 초서로 된 원본을 탈초하도록 명했다. 이는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를 설립하기 1년 전인 간세이 8년(1796년) 여름의 일이었다. 쥿사이는 하야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사숙을 일신하고자 많은 책을 수집했으며, 『국조정토록』 탈초도 그 일환이었다. 분카(文化) 연간에는 조선 통신사 응접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도록 하는 빙례(聘礼) 개혁에도 관여했다.
쥿사이의 학문은 주자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청(清)의 고증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는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나리시마 사나오와 공저), 朝野旧聞裒藁|조야구문부고중국어,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다만, 쥿사이 역할은 자료 선별이나 집필 체재 지도에 머물렀고, 실제 집필은 각 분담자에게 일임했다.[9]
일본과 중국 고금의 시재에 뛰어나 가집 『家園漫吟|가원만금중국어』을 남겼다. 중국에서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 서적을 모은 佚存叢書|일존총서중국어는 중국에서도 평가가 높다.
별장으로 錫秋園|석추원중국어(고이시카와)・賜春園|사춘원중국어(야나카)을 두고 있었다. 이와무라 번에 있었을 때 '백성신지유각서'(百姓身持之覚書)를 발견하여 막부의 '게이안 어촉서(慶安御触書)'로 출판했다.
하야시 ''대학두(大学頭)'' 쥿사이는 하야시 씨 가문의 유학자였으며, 이들은 모두 막부 관료를 위한 교육 훈련 시스템에서 중요한 인물로, 쇼군 임시 개인 고문 역할을 했다. 이 학자 가문의 시조는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하야시 가문은 도쿠가와 정권의 이론적 기초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하야시 ''대학두(大学頭)'' 쥿사이는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의 8대 세습 학장이었다.
1915년(다이쇼 4년), 종4위(종4위)를 추증받았다.[10]
2. 1. 가계와 초기 이력
하야시 쥿사이는 이와무라 번 번주 松平乗薀|마쓰다이라 노리모리일본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부이 다이시쓰(渋井太室) 등에게 배웠다.[9] 간세이(寛政)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가 사망하여 하야시 가문에 후계자가 없게 되자,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주선으로 쥿사이가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고 대학두(大学頭)가 되었다.[4] 이로써 쥿사이는 막부의 문서 행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쥿사이는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와 함께 간세이 삼학사(寛政の三博士)로 불리며, 유학 교육 쇄신에 힘썼다. 이들은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를 막부 직할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간세이 이학 금령寛政異学の禁).[9]
쥿사이는 주자학을 바탕으로 학문을 연구하면서도, 청(清)의 고증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나리시마 사나오와 공저), 『조야구문부고』(朝野旧聞裒藁),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의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9]
1915년(다이쇼 4년), 종4위를 추증받았다.[7]
2. 2. 하야시 가문 계승과 쇼헤이자카 학문소
간세이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가 사망하여 하야시 집안의 대가 끊기자, 쥿사이가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고 대학두(大学頭)가 되었다.[9] 그는 막부의 문서 행정 중추로서 막정에 관여했다.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와 함께 간세이 삼학사(寛政の三博士)로 불리며, 유학 교학 쇄신에 힘썼다. 기존의 쇼헤이코(昌平黌)를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로 바꾸고 막부 직할화를 추진했다(간세이 이학 금령寛政異学の禁).[9]쥿사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 서적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을 제자 오고 요시노리(大鄕良則)에게 초서로 된 원본을 탈초하도록 명했다. 이는 쇼헤이코를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바꾸기 1년 전인 간세이 8년(1796년) 여름의 일이었다. 쥿사이는 하야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사숙을 일신하고자 많은 책을 수집했으며, 『국조정토록』 탈초도 그 일환이었다. 분카(文化) 연간에는 조선 통신사 응접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도록 하는 빙례(聘礼) 개혁에도 관여했다.
쥿사이의 학문은 주자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청(清)의 고증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나리시마 사나오와 공저), 朝野旧聞裒藁|조야구문부고중국어,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다만, 쥿사이 역할은 자료 선별이나 집필 체재 지도에 머물렀고, 실제 집필은 각 분담자에게 일임했다.[9]
일본과 중국 고금의 시재에 뛰어나 가집 『家園漫吟|가원만금중국어』을 남겼다. 중국에서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 서적을 모은 佚存叢書|일존총서중국어는 중국에서도 평가가 높다.
별장으로 錫秋園|석추원중국어(고이시카와)・賜春園|사춘원중국어(야나카)을 두고 있었다. 이와무라 번에 있었을 때 '백성신지유각서'(百姓身持之覚書)를 발견하여 막부의 '게이안 어촉서(慶安御触書)'로 출판했다.
1915년(다이쇼 4년), 종4위(종4위)를 추증받았다.[10]
하야시 ''대학두'' 쥿사이는 하야시 씨 가문 유학자였으며, 이들은 모두 막부 관료를 위한 교육 훈련 시스템에서 중요한 인물로, 쇼군 임시 개인 고문 역할을 했다. 이 학자 가문의 시조는 하야시 라잔(林羅山)이었다.
하야시 가문은 도쿠가와 정권의 이론적 기초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하야시 ''대학두'' 쥿사이는 ''유시마 세이도(湯島聖堂)''의 8대 세습 학장이었다.
쥿사이는 이와무라 번(磐村藩)의 松平乗薀|마쓰다이라 노리모리일본어의 아들이었다. 그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에 의해 전 하야시 가문 수장이었던 하야시 긴포(林錦峯)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3]
이와무라 번(磐村藩) 마쓰다이라 가문은 형 두 명이 일찍 사망했기 때문에 셋째 아들 쥬사이(述斎)가 가문을 계승해야 했지만, 병약했기 때문에 메이와(明和) 7년(1770년) 12월, 후쿠치야마 번(福知山藩) 구키 다카요시 아홉째 아들이 노리모리(乗薀) 양자로 입적되어 가문을 계승하고 마쓰다이라 노리야스(松平乗保)라는 이름을 사용했다.[5] 성장한 후 쥬사이는 건강해졌지만, 병약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헤야즈미(部屋住) 신분이었다.[5] 쥬사이는 소년 시절 소라이 학파(徂徠学) 계열 유학자인 오시오 겐쇼와 핫토리 츄잔에게 유학을 배우고, 그 후, 하야시 가문 문인이자 주자학자인 시부이 타이시츠에게 입문했으며,[4] 셋츄 학파(折衷学) 계열 유학자인 호소이 헤이슈(細井平洲)에게도 유학을 배웠다.[5] 덴메이(天明) 5년(1785년)경에는, 다이묘나 막신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던 풍류 모임 "풍월사(風月社)"에도 참여하여 한시가로서 비범한 재능이 평판을 얻었다.[5]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주선으로,[5] 간세이(寛政)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 사망으로 단절되었던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여 대학두(大学頭)가 되어,[4] 막부 문서 행정 중추로서 막부에 관여한다. 근세 일본 문학 연구자 이비 타카시는, 사다노부는 쥬사이가 대학두(大学頭) 하야시 가문을 계승하는 데 적합한 학문적 재능뿐만 아니라, 간세이 개혁(寛政改革) 일환인 학제 개혁(더 나아가 그 일환이 간세이 이학의 금(寛政異学の禁)이다) 임무를 수행할 만한 정치적 수완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 후에, 하야시 가문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하고 있다.[5] 쥬사이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재능이, 단순히 유학자로만 사용되는 것을 아까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6]
쥬사이가 하야시 가문 유적을 계승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사다노부는 로주 수석 · 쇼군 보좌에서 면직되었지만, 그 전까지 사다노부가 주도해 왔던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 (쇼헤이코) 개편 · 정비를 통한 학제 개혁이라는 노선은 계승되었다. 그 학제 개혁 노선을 사다노부 후에 이어받아, 선두에 서서 실현해 나간 것이, 사다노부가 그 재능과 수완을 높이 평가하여 하야시 가문 양자로 삼은 쥬사이였으며,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 비토 지슈(尾藤二洲) (간세이 삼박사(寛政の三博士)) 등과 함께 유학(儒学) 교육 방식을 쇄신하는 데 힘쓰고, 쇼헤이코의 막부 직할화를 추진했다.[5] 간세이 9년(1793년) 12월, 막부는 학제를 크게 개정하여, 지금까지 제도상 하야시 가문 사숙으로 "관사 병행"되어 왔던 쇼헤이코를, 막부 직할의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했다. 아울러 하야시 대학두(大学頭) 녹봉은 3000석(종전에는 1523석)으로 두 배로 늘리고, 좌반은 오쿠즈메슈(奥詰衆) 고쇼구미(小姓組) 반토(番頭) 차석(종전에는 오쿠즈메)으로 격상되었다. 그 후, 분카(文化) 연간에 있어서의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접대를 쓰시마(対馬)에서 행하는 예법 개혁에도 관여했다.[4]
쥬사이 학문은, 주자학(朱子学)을 기초로 하면서도 청(清)나라 고증학(考証学)에 관심을 보였으며, 『간세이 중수 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나루시마 시 나오(成島司直)와 공동) 『조야 구문 포고(朝野旧聞裒藁)』,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자료 선별이나 체제 지도에 머무르고, 실제 집필은 분담자에게 일임했다.[4]
화한의 시재에 뛰어나, 가집 『家園漫吟|가원만음중국어』 등이 있다. 중국에서 산실된 한적(漢籍) (일존서(佚存叢書))을 모은 『일존총서(佚存叢書)』는 중국 국내에서도 평가가 높다. 별장으로 錫秋園|석추원중국어(고이시카와(小石川)) · 賜春園|사춘원중국어(야나카)을 소유하고 있다. 이와무라 번(磐村藩) 시대에 "백성 신분 지각서"를 발견하고, 막부의 "케이안 어촉서(慶安御触書)"로서 출판했다.
다이쇼(大正) 4년(1915년), 종사위(従四位)를 추증받았다.[7]
2. 3. 간세이 이학 금령과 학문적 활동
시부이 다이시쓰(渋井太室)에게서 배웠다.[9] 간세이(寛政)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가 사망하여 하야시 집안의 대가 끊기자, 쥿사이가 하야시 집안을 이었고 대학두(大学頭)가 되어[9] 막부 문서 행정의 중추로서 막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 등 간세이 삼학사(寛政の三博士)와 함께 유학 교학 쇄신에 힘을 쏟아, 쇼헤이코(昌平黌)를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로 바꾸고 막부 직할화를 추진하였다(간세이 이학 금령(寛政異学の禁)).[9]쥿사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의 서적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을 제자 오고 요시노리(大鄕良則)에게 초서로 된 원본을 탈초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쇼헤이코를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바꾸기 1년 전인 간세이 8년(1796년) 여름의 일이었다. 쥿사이는 하야시 집안의 사숙을 일신하고자 많은 책을 수집하였고, 『국조정토록』 탈초도 그 일환이었다. 분카(文化) 연간에는 조선 통신사 응접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도록 하는 빙례(聘礼) 개혁에도 관여하였다.
쥿사이의 학문은 주자학을 토대로 하면서도 청(清)의 고증학에도 관심을 보였다.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나루시마 사나오와 공저), 『조야구문부고(朝野旧聞裒藁)』,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 편찬 사업을 주도하였으나, 자료 선별이나 집필 체제 지도에 머물렀고 실제 집필은 각 분담자에게 일임하였다.[9]
일본과 중국 고금의 시재에 뛰어나 가집 『가원만금(家園漫吟)』을 남겼다. 중국에서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 서적을 모은 일존총서(佚存叢書)는 중국에서도 평가가 높다.
2. 4. 막부 편찬 사업과 외교
간세이 5년(1793년), 하야시 긴포(林錦峯)가 사망하여 하야시 집안의 대가 끊기자, 쥿사이가 하야시 집안을 이었고 대학두(大学頭)가 되었다.[9] 그는 막부의 문서 행정 중추로서 막정에 관여했다. 시바노 리쓰잔(柴野栗山), 고가 세이리(古賀精里), 비토 지슈(尾藤二洲)와 함께 간세이 삼학사(寛政の三博士)로 불리며 유학 교학 쇄신에도 힘을 쏟았다. 기존의 쇼헤이코(昌平黌)를 쇼헤이자카 학문소(昌平坂学問所)로 바꾸고 막부 직할화를 추진했다(간세이 이학 금령寛政異学の禁).[9]쥿사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온 조선의 서적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을 제자 오고 요시노리(大鄕良則)에게 초서로 된 원본을 탈초하도록 명했다. 이는 쇼헤이코를 쇼헤이자카 학문소로 바꾸기 1년 전인 간세이 8년(1796년) 여름의 일이었다. 쥿사이는 하야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사숙을 일신하고자 많은 책을 수집했고, 『국조정토록』 탈초 역시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분카(文化) 연간에는 조선 통신사 응접을 에도가 아닌 쓰시마에서 행하도록 하는 빙례(聘礼) 개혁에도 관여했다.[4]
쥿사이는 『간세이 중수제가보(寛政重修諸家譜)』, 나리시마 사나오와 공저한 『도쿠가와 실기(徳川実紀)』, 『조야구문부고(朝野旧聞裒藁)』, 『신편 무사시 풍토기고(新編武蔵風土記稿)』 등 막부 편찬 사업을 주도했다. 다만 쥿사이의 역할은 자료 선별이나 집필 체재 지도에 머물렀고, 실제 집필은 각 분담자에게 일임했다.[9]
3. 학문적 입장
하야시 쥿사이는 하야시 씨 가문의 유학자로, 하야시 라잔을 시조로 하는 이 가문은 대대로 쇼군의 개인 고문 역할을 하며 막부 관료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야시 라잔의 철학은 19세기 말까지 막부의 지배 이념의 기초가 되었으며, 사무라이 계급의 자기 수양을 강조하여 널리 퍼졌다.[2] 하야시 가문은 도쿠가와 정권의 이론적 토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쥿사이는 유시마 세이도의 8대 세습 학장이었다. 쥿사이는 이와무라 번의 마쓰다이라 노리모리의 아들이었으며,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하야시 킴포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3]
3. 1. 평가
하야시 쥿사이는 하야시 씨 가문의 유학자였다. 이들은 모두 막부 관료를 위한 교육 훈련 시스템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쇼군의 임시 개인 고문 역할을 했다. 이 학자 가문의 시조는 하야시 라잔이었다. 하야시 라잔의 철학적이고 실용적인 논리는 19세기 말까지 막부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기초가 되었다.이러한 발전은 부분적으로 사무라이를 교양 있는 지배 계급과 동일시하는 공식적인 하야시 ''도식''에서 비롯되었다(비록 사무라이는 도쿠가와 막부 초기에 대체로 문맹이었지만). 하야시 가문은 군국주의적인 막부의 역할을 정당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철학은 또한 사무라이 계급이 자기 수양을 하도록 장려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이는 그의 생애와 그 이후에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될 추세였다.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라잔의 금언 중 하나가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 "무기가 없이는 진정한 배움이 없고, 배움이 없이는 진정한 무기가 없다."[2]
하야시 가문은 도쿠가와 정권의 이론적 기초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하야시 ''다이가쿠노카미'' 쥿사이는 ''유시마 세이도''의 8대 세습 학장이었다.
쥿사이는 이와무라 번의 松平乗薀|마쓰다이라 노리모리일본어의 아들이었다. 그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에 의해 전 하야시 가문의 수장이었던 킴포의 후계자로 임명되었다.[3]
4. 가족
사후에는 적남 하야시 죠우가 하야시 가문을 이었다. 3남은 토리이 요우조우, 6남은 하야시 후쿠사이였다. 딸로는 시타라 사다타케와 호리 토시카타에게 각각 시집간 두 명이 있었으며, 외손자로는 이와세 타다시(시타라 사다타케의 아들), 호리 토시히로 등이 알려져 있다.
5. 문인
문하 제자로 사토 잇사이(이와무라번 출신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주종 관계였다)·마쓰자키 고도가 이름을 날렸으며, 이베 고잔, 가사이 인제, 아오바 한잔 등도 쥿사이의 문인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다.[11]
참조
[1]
서적
Ponsonby-Fane
[2]
서적
The Heart of the Warrior
1999
[3]
서적
Charismatic Bureaucrat
[4]
서적
日本古典文学大辞典第5巻
岩波書店
1984-10
[5]
간행물
寛政異学の禁と学制改革 ─老中松平定信から大学頭林述斎へ─
https://doi.org/10.2[...]
日本学士院
2023-05-12
[6]
서적
甲子夜話
[7]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8]
문서
師弟関係図
http://kohkosai.web.[...]
[9]
인용
[10]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11]
문서
師弟関係図
http://kohkosai.web.[...]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